문화/관광

시흥행궁터 등 10개소

시흥행궁터 사진
시흥행궁터

시흥군의 중심지였던 시흥행궁은 조선시대 정조가 생부(生父)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행길에 묵었던 곳으로, 1795년 윤2월 9일, 2월 15일, 1797년 1월 29일 등 수 치례에 걸쳐 활용되었다.

당시 행궁의 규모가 114칸이었고 정조의 화성 능행 이후에도 존속되었으나 철종 때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원래 금천(衿川) 혹은 금양(衿陽)이라고 불렸던 시흥군은 시흥로의 개설과 함께 시흥행궁이 세워지면서 시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금천 지역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이에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금천구 일대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 가꾸기 위해 금천구 시흥행궁지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와 문헌 및 회화자료를 조사하였고, 2017년 금천구에서는 시흥행궁 복원 및 활용 방안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위치의 대강을 카멜리아 또는 형제약국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2022년 7월 시흥5동청사 6층에 시흥행궁전시관을 개관하여 운영중이다.

소재지

금천구 시흥동 831-6 일대

향나무와 3층석탑 사진
향나무와 3층석탑

탑동초등학교에서 50m떨어진 주택가에 수령이 500년 이상된 향나무와 3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향냐무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동네명칭은 탑이 세워져 있던 동네라 하여 탑곡 또는 탑골 그리고 골짜기란 뜻의 탑시골이라고도 한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측되며, 구전에 의하면 손이 없는 집안의 아낙네가 공을 들이면 득남하였다고 한다. 외부 주민이 유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원주민들은 3층석탑에 1년에 한번 모두 모여 동네의 평온과 안녕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소재지

금천구 시흥동 230-40

동헌관아자리 사진
동헌관아자리

시흥동 831번지 일대 금천현(시흥현) 동헌 관아가 있던 곳으로서, 현령들이 거주하였고 주변에는 동헌의 말들이 있었다하여 ‘마방(馬房)자리’ 아전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다하여 ‘아전(衙前)골목’, 동헌의 육방 중 하나인 병방이 있어 병사들이 주둔했다 하여 ‘병사(兵士)터’, 현령들의 송덕을 기리는 비가 있었다 하여 ‘비석(碑石)거리’ 라고 현재도 불리고 있다.

소재지

금천구 금하로21길 14(시흥동 831) 일대

시흥향교터 사진
시흥향교터

향교는 지방에 있던 문묘(文廟)와 거기에 부속되어 있던 옛날의 학교를 가리키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에 설치된 일종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고, 강당으로 명륜당을 설치하였다. 「시흥군읍지」에 따르면 시흥향교에는 성전(聖殿) 6칸과 명륜당 6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흥향교는 1944년까지 존속하다가 과천향교에 통합되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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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금하로29길 6(시흥동 263-25)

강희맹 살던 곳 사진
강희맹 살던 곳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강희맹(1424~1483)이 살던 집터가 있다.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경순(景醇)이었다. 또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강희맹은 지돈녕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 형제로는 화가 희안(希顔)이 있었다.

강희맹은 이곳에서 살면서 조선초기 「농사직설」과 쌍벽을 이루는 농서인 「금양잡록」을 저술하였으며, 조선 초기 경기도 일대의 농업환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희맹은 「금양잡록」 외에도 「사숙재집」등 총17권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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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

흥선대원군 별장 터 사진
흥선대원군 별장 터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에는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이 있었다. 이 별장은 136평의 건물로 구조상으로 별장이기보다는 살림채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곳은 한 개의 사랑채와 두 개의 안채로 구성되어 서울 대가(大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옥이었다. 정계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이 호암산 한우물 아래에 위치한 이 곳 별장에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이 곳은 고 정주영의 소유로 되었다가, 지금은 철거되고 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재지

금천구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단군전 터 사진
단군전 터

일제 강점기때 명월관과 식도원 등을 경영했던 안순환이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이곳(시흥동 169-18)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그 좌측 약간 떨어진 곳에 1930년 단군전을 세웠다. 단군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37년 이후 일제 탄압에 의해 소멸되었다. 단군전 봉건화에 의해 1948년 2월에 단군전이 옛 모습 그대로 중수되었으나 1981년에 다시 헐리고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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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독산로24길 43(시흥동 169-53)

말미고개 사진
말미고개

말미고개는 시흥대로 중 독산동 롯데캐슬골드파크아파트부터 말미사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가리킨다. 이 고개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온 지세가 말의 모습과 비슷해서 처음에는 ‘말뫼(馬山)’라 하였는데 말(馬)과 말(斗)의 발음이 같은데서 말뫼가 말미로 전음되었고 그 뜻도 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치러가던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쉬면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시흥대로 50m의 폭을 넓히고 고개를 깎는 공사를 벌일 때 많은 말 뼈가 나왔다고 전한다. 2008년 구민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말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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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시흥대로 334(독산동 1055)

비석거리 사진
비석거리

시흥5동의 수령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 부근(시흥동 1000-124일대)을 비석거리라고 불러왔다.그 이유는 시흥현령 선정비 4기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선정비가 있었으나 수해로 없어지고 인위적으로 파손되어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현령(종5품) 김병이, 이장혁, 조용구, 방천용의 선정을 칭찬한 비석이다. 선정비는 떠난 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관례로 보아 김병이 현령의 선정비는 1878년, 이장혁 선정비는 1879년경, 조용구 선정비는 1884년경, 방천용 선정비는 1892년경에 각각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소재지

금천구 시흥동 1000-124 일대

반유구화역 터 사진
반유구화역 터

역원이란 역참(驛站)과 원(院)을 함께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금천의 역원으로는 반유구화역이 있었다. 반유구화역은 독산고개에 있었으며 이곳의 마을명이 반시인데 반시는 반수의 변음이다. 반수는 마치 마을 모습이 대야에 담아놓은 물처럼 고요하여 조용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역참은 국가의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역마를 이용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이다. 역이 있는 곳에는 원(院)이 있었는데 원(院)은 공무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을 말한다.

소재지

금천구 시흥대로150길 6(독산동) 독산고개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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